신앙개혁(강의용)

09. 제어해야 할 우리의 마음 2 - 과장된 상처

손마가 2022. 2. 23. 10:02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회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애가 강해 남에게 상처를 받으면 그것의 다섯 배나 되는 칭찬과 위로와 사랑을 받아야 보상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이에게 세 번 잘해주다가 한 번 상처를 줬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는 당신에게 받은 한 번의 상처 때문에 당신을 미워하게 될 것이고, 당신은 세 번이나 잘해줬는데 겨우 한 번 가지고 그러느냐며 따질 것입니다. 이제 입장을 바꿔봅시다. 만약 어떤 이가 당신에게 세 번 잘해주다가 한 번 상처를 줬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분명 당신은 그가 준 한 번의 상처 때문에 그가 미워질 것입니다. 세 번이나 잘해줬으니 상처 한 번 정도는 감수해도 되는데 말입니다. 그런 당신을 그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자 본능입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 누구도 이러한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는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늘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쉽게 생각하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만약 다섯 번의 큰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의 상처를 회복되기 위해서는 그에게 스물다섯 번이나 지극정성으로 잘 대해줘야 하는데 어느 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지독한 피해의식인 것입니다. 이러한 편향된 성향으로 인해 인간은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은 누구 할 것 없이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감사할 줄 모르고,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그러한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믿지만, 그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성향이 우리 주변 사람에게, 우리 교회에, 우리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친다는 알아야 합니다.

요즘시대는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많은 사람이 모여 살다보니 이런 상처들이 더욱 많아집니다. 그래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관계 맺기를 꺼려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남과 어울리려 해도, 부딪히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일이 잦아 관계를 잘 맺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면 살수록 인간관계의 폭은 점점 더 좁아지는 것입니다.

  상처가 깊은 현대인들이 다른 이를 만나면 서로가 상대의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생각, 게으름 등의 죄성으로 인해 상처를 받습니다. 자신이 준 상처는 당연하고 남이 나에게 준 상처는 5배나 과장합니다. 이것이 분노와 미움으로 변하고 마음속에 상처를 더욱 깊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받은 상처가 실제의 5배나 과장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잠 18:19]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인간의 죄성은 특히 이질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더욱 큰 분노와 혐오를 느끼고 상처도 더욱 많이 과장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당한 피해와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당한 본 피해를 다르게 느낍니다. 그래서 흑인은 백인을 증오하고 백인은 흑인을 혐오하며, 한국인은 일본인을 미워하고 일본인은 한국인을 싫어합니다.

  이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몇 가지 사례를 가지고 그 집단 전체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부당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합니다.

  “부당한 일반화의 오류”란 몇 개의 사례나 경험으로 그 집단 전체를 단정 짓고 판단하는데서 생기는 오류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몇몇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저 학교 애들은 다 그래”, “저 지역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달라”, “우리 교단 사람들은 신학이 바른데 저 교단 사람들은 신학이 바르지 못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부지런한데, 저 나라 사람들은 다 게을러” 등과 같이 일반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편협하고 잘못된 생각이지만, 자신이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이상 대부분 이들이 그것을 당연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교회에서조차 당연시하며 방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을 혐오하고, 서로 원수 맺고, 분열하는 원인이 됩니다. 인도자들은 이것이 죄라는 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할 것을 외쳐야 합니다. 이로 인해 죄가 불거져 교회가 부패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묵인한 인도자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의 근본 원인이 과장된 피해의식과 혐오 때문이며 누구나 이런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종과 나라와 민족과 출신에 관계없이 공의로 판단하라 하셨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9]

  문제는 이런 현상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뉴스나 인터넷에서 악한 사람들이나 범죄자들에 대한 보도가 나오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또 여러분의 지인들이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 이야기, 악한 사람들 이야기, 범죄자들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마치 우리 주변에 온통 나와 나의 가족에게 큰 피해를 끼칠 악한 사람과 범죄자들로 가득한 것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실제로는 아무 피해도 입은 적이 없는 사람조차도 그러한 혐오와 피해의식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받은 상처를 5배나 과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없는 상처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우리는 내가 남을 혐오하는 이유가 내 안의 과장된 상처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지 경각심을 갖고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그냥 내버려둘 겁니까?

  사실 과장된 상처의 문제는 현대사회의 도시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는 시골 마을에서는 이웃과 가족같이 지내지만, 도시에서는 이웃과 주변 사람들이 마치 잠재적 범죄자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도 시골보다 도시의 범죄율이 더 높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인간의 과장되고 편향된 피해의식과 혐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범죄나 사고에 대해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조심하는 것과 혐오와 피해의식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조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혐오와 피해의식은 해소하지 않은 채 내면에 그대로 쌓아두게 되면 아무런 죄의식 없이 타인에게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을 수 있게 됩니다.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고 있는 집단 따돌림이나 인터넷 악성 댓글이 그 대표적 사례 아닙니까?

게다가 이런 혐오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실제로 피해를 입기라도 한다면 그는 실제보다 5배나 더한 피해를 느끼며 타인에 대한 강한 혐오와 반감을 내면에 완전히 고착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타인에게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악인 줄 모릅니다.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정의를 행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타인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무서운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학자들은 지나치게 높은 자의식(自意識)이 범죄를 유발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갑질을 하다 사회 문제가 된 사례를 보면 예외 없이 그들의 특권의식과 우월의식이 그 원인입니다. 그들은 늘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므로 남들과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면 피해의식을 느껴 자신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므로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정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아도 자신이 못난 탓이라 여기며 참고 넘어갑니다. 두 경우 다 문제이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쪽은 항상 높은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들 들면 1차, 2차 세계대전도 지나치게 높은 자의식에서 유발된 것입니다. 즉, 힘센 육식 동물이 약한 초식 동물을 잡아먹는 게 당연하듯 자기 민족은 우월하기 때문에 열등한 나라들을 정복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학자들은 미국에서 사회문제가 된 혐오범죄나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을 보면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이러한 특권의식과 우월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백인들이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 특혜를 누려왔습니다. 그런데 유색인종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면서부터 백인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를 그들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미국에서 가장 많이 억압받고 착취당했던 계급은 흑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불이익을 당해 비교적 낮은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차별당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높은 자의식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은 남들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고, 남들보다 더 많이 누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다가 남들보다 나은 대접을 받지 못하거나, 남들보다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할 때는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양 생각해 남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상처가 과장된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이러한 인간의 심리들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우리를 멸망케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봤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멸망한 것은 하나같이 그들이 자기 마음 가는대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해의식과 혐오하는 마음이 생길 때 마음 가는 대로 행하면 그로인해 큰 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멈춰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씻지 못할 큰 상처와 큰 피해를 주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작금의 교회가 다른 말씀은 다 잘 실천하면서도 유독 ‘서로 사랑하라’, ‘형제를 사랑하라’라는 최고 계명만은 지키지 못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새겨진 타인에 대한 과장되고 왜곡된 피해의식과 혐오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에 대해 인도자들이 선지자적, 제사장적 책임을 다해야 하지만, 그들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져 있습니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2-24]

  이렇듯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에게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사회에서 악을 행하고, 교회에서 악을 행하고, 믿는 형제자매들에게 악을 행하는 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는 공의와 정의를 잃어버렸습니다. 잘못된 가치관으로 남에게 혐오와 분노를 마구 쏟아내는 사회와 교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피해의식과 혐오를 씻기 위해서는 그것의 5배의 위로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 사랑을 어디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가능합니다. 성경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며 우리의 피해의식이 허상이며 과장된 것임을 깨달으면 됩니다. 남과 비교하면 자신을 항상 의롭게 여길 것이므로 반드시 성경말씀과 비교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선할 것 하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심한 피해를 당한 적도 없었는데도 하나님께서 피해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셨는데도 우리가 마치 큰 피해자인양 착각하고 또 언제 큰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음과 작은 상처에도 큰 상처인양 과장하는 죄성 때문에 남들을 경계하고 미워함으로써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남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히 회개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상처 준 자들의 죄와 잘못을 모두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와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눅 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 6:12-13]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위 말씀들을 이렇게 이해해보십시오.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형제를 사랑하면 이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험에 들거나 악에 빠질 때 하나님께서 그 꾸신 것을 돌려주셔서 시험에 드는 것과 악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실 것입니다(눅 6:32-38). 그런데 이 시대에는 아무도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지 않아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다 보니, 용서와 사랑은 아무도 가르치지 않고 누구도 행하지 않는 불신앙의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로인해 교회는 점점 쇠퇴해져 가고만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남의 허물과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더 나아가 그런 이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것을 갚으셔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도 구하실 것입니다.

  필자가 용서와 사랑에 대해 이처럼 강조하는 것은 이것만이 하나님께 우리 죄를 용서받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요일 1:7; 마 6:12; 눅 7:47-50, 11:14). 그러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행하게 하십니다(겔 36:27; 빌 2:13).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삽니다(마 6:14-15; 요일 3:14-15).